고한의 역사
연혁
  • 조선시대 : 동상면내 고토일, 물한리 구역
  • 광무20년 : 동상면, 중동면을 합하여 동면이라 칭함
  • 1910년 : 고토일, 물한리를 고한리(법정리)로 통합
  • 1962. 11. 19 : 동면 사북출장소 설치
  • 1985. 10. 1 : 사북읍 분리로 고한읍 개칭
고한의 전경
명칭의 유래

고한읍


고한읍은 조선시대에 동상면에 속했던 고토일, 물한리로 광무 10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시 동상면, 동중면이 통합되어 화암면이 되는 동시에 고토일, 물한리를 합쳐 고한리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고토일, 물한리, 갈래, 대두문동, 소두문동, 만항, 박심으로 구분되며, 30년전에는 780호 정도가 살고 있던 한적한 산촌이었는데 무진장으로 매장된 석탄이 개발됨에 따라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현재 지방행정리 25개리로 주민 2,5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고토일(古土日) | 고한 14리


고려 중기 유랑민들이 고한 지역에 와서 토질이 가장 좋은 부락을 선정하여 최초로 정착한 곳이 고토일이다. 윗마을, 아랫마을, 골마을로 구분되어 있으며 토질이 좋은 땅이라 하여 고토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물한리(勿汗里) | 고한 25리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에서 물한리재를 올라올 때는 땀이 줄줄 흘러 매우 피로하였으나, 물한리로 내려올 때는 울창한 산림과 맑은 시냇물에 오히려 추위를 느끼고 땀이 들어간다 하여 물한리라 부르게 되었다.




만항 | 고한1리


조선시대에 고향인 평안도를 버리고 이곳에 이주해 와 살던 두문동 주민들이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이 지역의 제일 높은 만항에서 물 한 그릇 떠놓고 빌었다하여 '망향'이라 불려졌다. 일제시대에 최초로 광산이 개발되어 일제에 항거하던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여 촌락을 형성해 오다가 해방이 되자 원래의 주민들은 모두 고향으로 떠나고 화전민 몇 가구만 남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초 본격적인 광산개발이 활기를 띔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생활빈곤자들이 몰려들어 살게 됨으로 인해, 말이 잘못 변천되어 지금은 '만항'으로 불리고 있다.




범소부락 | 고한13리


이곳은 1972년 8월 이전에는 논(沓)이었으나 9월 장마로 수몰되어 버려 북부사택에서 몇몇 세대가 이동하여 촌락을 형성하였다. 소수세대지만 평소 근면하고 모범적인 마을이라 하여 '범소'로 불렀으며 그 이후로는 동원탄좌에서 많은 주택을 건축함으로서 '범소주택'으로 개칭되었다.




진밭골 | 고한15리


이곳은 광산 개발 이전에 다른 부락보다 밭이 모두 특이하게 길어 진밭골이라 불렀다한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하여 있다.




등마을 | 고한23리


신 사택 옆의 동네로서 행정구역으로는 고한23리이다. 그 동네는 한번 올라갔던 사람은 또 다시 올라가기는 싫은 곳이라 하여 등마을 이라 부르고 있다.

인물

의병(義兵) 김시중 장군(金時中 將軍)


강원도 정선군 동면(현 고한읍) 고한리에서 출생, 수년간 한문수학하여 일찍이 향교의 장의까지 지냈다. 1907년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에 가담. 왜군에 항거하여 용감히 싸웠다. 1909년 부하 약 50명을 인솔하고 지금의 사북읍 도사곡에서 일본병대와 치열한 교전중, 용감히 싸우다 적탄을 맞고 순직했다. 당시에는 시신마저 제대로 거둘 수 없어 가매장하였다가 후일 동생인 김시백이 부하와 같이 밤중에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내리 앞골 뒷산에 산소를 모셨다. 그러나 현재 그 묘소는 찾을 길이 없다. 1968년 3월 1일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으며 1986년 8월 15일 사북 도사곡 입구에 김시중 장군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전설

노승과 이리


이조말기 불교사 쇠퇴할 때 고한읍 고한리(古汗里) 갈래사(현 정암사)에 한 노승이 혼자서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날 하루 저녁때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던 중 전방 약 100보 정도 거리에 큰 개만한 산짐승이 이 노승을 한참 바라보고 갔다. 노승은 저녁밥을 지으며 가만히 혼자 생각해 보니 분명히 오늘밤에는 저 이리 놈들한테 변을 당할 것 같아 피신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때가 늦어 이웃 동네까지는 거리가 멀어 갈 수 없자 노승은 별 수 없이 저녁을 지어먹고 도끼와 낫 그리고 잿파리 등을 준비하고 승방 아랫목에 장삼(長衫)을 단정히 입고 앉아 마음속으로 불경을 외우며 다가오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뒷산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다 쓰러져 가는 고찰이라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는 집이여서 문을 잠그지도 못하고 있자니 잠시 후 이리떼들이 몰려 와 방안으로 들어 갈 곳을 찾던 중 한 놈이 앞발을 걸고 문을 당겨 문이 열리자 10여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니 문은 저절로 닫혀지고 방안에 들어온 이리떼는 일렬로 나란히 앉았다. 노승은 아랫목에서 죽은 듯이 앉아 동정만 살피고 있자 어느 놈인지 한 놈이 꾹 하고 신호를 하니 일제히 꾹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오기를 수번이 되자 노승과 이리와의 거리는 불과 한발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노승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고 잿파리를 두드리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닥치는 대로 발로 차니 이리떼는 혼비백산하여 노승과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장판이 되었다. 얼마 동안을 노승은 사력을 다하여 치고 박고 하는 동안 한 놈이 잘못하여 문에 넘어지는 바람에 문이 열리자 이리들은 살았다고 우루루 꽁지가 빠져라고 도망을 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노승은 다음날 이리 똥을 치는데 하루해가 다갔다고 전한다.